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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 서민의 표상

                                                  이  정  길
                                                      전남대학교 명예교수/수필가

토끼는 사람과 친숙하고 온순하며 귀여워서, 전세계 여러 나라의 신화에서 성스러운 동물로 묘사되고 있다. 순결한 털빛깔과 평화로운 이미지 때문에, 우리 조상들은 달에 있는 계수나무 아래서 불로장생의 선약을 절구에 찧고 있는  토끼가 천 년을 산다고 믿었다. 북아메리카 인디언 사회에는 토끼가 인류를 지하세계에서 해방시켰다는 설화가 있고,  나이지리아 한 부족의 민화에서는 토끼가 왕의 사신으로 인간과의 중재자 역을 맡기도 한다.

생물은 그 생활환경에서 살아가기 쉽게 형태적으로나 생리학적으로 변화하여 간다. 토끼의 날렵한 몸짓이나 영리한 행동은 모두 살아남기 위해 발달한 것이다. 근육이 잘 발달된 귀를 자유롭게 움직여 주위를 경계한다. 앞다리보다 뒷다리가 훨씬 더 발달된 것은, 순하기만한 녀석들이 늑대 × 여우 × 너구리 × 독수리 같은 천적들을 따돌리고 뛰다 보니 자연스레 진화한 현상이다. 많을 때는 무려 열다섯 마리의 새끼를 낳는 것은 종족을 보존하려는 생리적인 현상이다.

털이나 털가죽을 생산하려고옛날부터 사육되어온 동물이 토끼다. 앙고라 종의 흰털, 친칠라 종이나 렉스 종의 회청색 또는 회색 털가죽이 일상생활에 많이 이용되었다. 한편, 순백색에 귀 입 발끝 꼬리만 검정색인 히말라얀 종은 애완용으로 길러지기도 했다. 거기다 고기는 단백질이 풍부하여 부드럽고 연하며, 닭고기와 비슷한 맛을 가지고 있다.

토끼는 다른 동물을 존중하고 자애로워 어떤 사람에게나 호감을 주는 동물로 알려져 있다. 사상가들은, 행정가는 모름지기 토끼 같은 덕을 지녀야 한다고 충고한다. 평화론자들은 날짐승으로는 비둘기가, 길짐승으로는 토끼가 대표적인 평화의 상징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민화에 나타나는, 커다란 호랑이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토끼는 평등의 상징이기도 하다. 간을 내주는 희생정신을 가지고 있는가하면 위기를 모면하는 지혜의 화신이다. 

내게는 어렸을 적 어느 눈 많이 내리던 날, 마을의 형들을 따라 토기몰이를 갔다가 허탕치고 돌아온 기억이 있다. 어른들을 졸라 토끼장을 만들어 놓고 토끼를 기르다가, 먹이를 대는 것이며 배설물을 치우는 일이 감당하기 어려워 포기해버린 씁쓸한 기억도 있다. 지금 나는 울타리를 따라 돌면 5킬로미터가 되는 앨버커키 아카데미 부근에 살고 있다. 출입문을 세 개나 가진 이 학교는 가운데 건물과 그에 연결되는 길 이외에는 모두 잡초가 무성한 빈터다. 사막과 흡사한 빈터에는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산책로가 여러 갈래 나 있다. 건물 사이사이 잘 가꾸어 놓은 잔디에서는 토끼들이 살고, 좀 떨어져 한적한 곳에서는 코요테들이 산다. 건물 주변을 서성이다가 어린 토끼들이 보이면 발길이 저절로 멎는다.

긴 귀에 짧은 꼬리 그리고 입 양쪽에 난 긴 수염이 볼수록 귀여운 토끼. 토끼는 늘 같은 길만 다닌다. 쫓기면 돌아보지도 않고 줄곧 달아나는 토끼가 우리 속담에서는 흔히 잡기 어려운 짐승으로 또는 겁쟁이로 비친다.  때로는 교활하거나 속임수에 능한 동물로 비치기도 한다. 그러나 토끼의 슬기롭고 부지런함은, 털끝만큼의 방어수단도 갖추지 못한 동물로서 생존경쟁이 치열한 야생생활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를 변화시킨 모습인 것이다.
토끼는 땅에 굴을 파고 그 속에서 산다. 불의의 사태에서 벗어나려고 굴에는 반드시 세 개의 비상구를 만들어 둔다. 같은 길로만 다니지만, 천적에게 쫓길 때는 새끼가 있는 곳을 피해 멀리 돌아 달아난다. 그리고 먹이가 부족하여 먹여 살릴 수 없다고 판단되면 새끼를 먹어버리기도 하는데, 훗날 먹이가 풍족해지면 더 많은 새끼를 낳아 기르겠다는 희망에서 어쩔 수 없이 취하는 행동이다.

토끼띠의 사람은 원만한 기풍과 자애로운 정을 지녀서 다른사람들에게 호감을 준다고 알려져 있다. 착한 성질을 타고난 이상주의자이며, 심미적 감수성이 뛰어나 예술가적 기질을 가지고 있다. 또한 내성적이고 매사에 완벽을 기하려고 노력하는 타입이어서 학자가 되기에도 알맞다. 상냥하고 지적인 태도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신임을 받는다. 반면, 온순해 보이는 성격의 이면에 강한 의지와  자기도취적인 자신감이 있어 지나친  상상력을 발휘하며, 예민한 경향 때문에 냉정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토끼해에 우리나라에는 경사가 많았다. 고구려 태조왕 때는 나라 사상 처음이랄 수 있는 사면령이 내려졌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 때인 1087년에는 우리의 최고 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이 완성되었다. 조선조 세종대왕의 치세인 1447년에는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이 편찬되었고, 1867년에는 경복궁 근정전과 경회루가 완공되어 왕실의 위엄이 삼천리강산에 떨쳤다. 토끼해에 태어난 인물에는 지혜롭고 덕 높은 사람이 많았다. 김부식 × 김시습 × 지석영 × 한용운 × 안중근 × 양주동 × 이은상 등이 모두 토끼띠였던 것이다.

순하기만한 토끼가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굴을 세 개나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교토삼굴 (狡兔三窟) 이라하여, 사람이 난을 피하는 데에 교묘함을 이르는 말로 쓴다. 토끼처럼 지혜로운 사람이 많이 태어나서 온 세상이 평화로워지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사람의 본성은 착한 것이기에 내 기대가 결코 헛된 건 아니라고 믿는다. 언젠가는 그런 날이 반드시 온다는 희망을 가지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을 향상시키는 일부터 시작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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