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가 소년 시절에 섬겼던 교회에 미국인 여 선교사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 분께서는 서툰 한국말 이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고 한국말로 설교 하기를 좋아 하셨습니다. 어느해 신년 첫 주일날 설교를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새년'이 왔습니다." '새해'를 '새년'이라고 표현하였기 때문에 청중들이 웃기 시작 했습니다. 설교를 듣고 있는 교인들이 미소 짓고 있는 것을 보시고 신이 난 이 선교사님은 더욱 큰 소리로, "여러분! '흔년'은 지나가고 '새년'이 왔습니다. 다같이 새마음으로 힘차게 맞이 합시다." 청중들은 더욱 배를 부여잡고 웃음을 참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365일을 또 지냈습니다. 그 한 해를 정리하고 또 새로운 한 해를 시작케 하시는 그 분의 역사속에 우리는 만가지를 경험하며 꿈꾸며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저절로 '새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 새해가 되었다고 저절로 '새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더구나 자기가 누구인지 분수를 모르는 경우에는 그날이 그날이고, 그해가 그해 일 뿐입니다. 새로운 것이 없어 때론 지루한 세월, 의미없는 시간만 흘려 보낼 뿐 입니다. 샘 솟는 기쁨과 약동하는 생명을 놓치고 소중한 시간만 낭비하는 안타까운 모습도 봅니다. |
 |
|
|
|
성경 사사기는 우리의 존재를 정확하게 짚어 주고 있습니다. 자기의 알량한 아집, 고집, 소견을 내 세우고, 자기가 자신을 통치하는 왕(ego)이 되어 살아 왔던 '옛 모습'을 버리지 않는한, 우리 모두는 너나 할것없이 자기 노력만 으로는, 새로운 존재가 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권력, 돈, 성공, 뛰어난 미모, 명성, 자존심, 자아, 명분, 소유 등등 ------이와같은 것들을 하나님 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다면 , 그것들이 우리 마음 속에서 하나님 자리를 점령하게 되어, 우리의 허약한 마음은 어느새 각종 우상들로 우굴 우굴한 우상 집합소 같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고 탄식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우상들의 지휘를 받느라 현대인들은 바쁘게 뛰어 다니고 있습니다. 피곤하고 지쳐 있습니다. 할 일, 못 할 일 분별을 못하게 되고 맙니다.
이런 피곤한 삶은 생각 보다 훨씬 더 위험 합니다. 가짜 신들, 즉 우상들의 결국은 우리를 허무, 허탈로 이끌뿐이기 때문입니다. |
|
 |
|
|
인생에 대한 잘못된 이해(understanding)는, 새해가 밝았으나 아무 감격도, 감동도 없이 조금도 새로워 지지 못하는 이유 입니다. '내 인생의 선장은 나 다!'라고 장담 하다가 부질없이 무익한 수고만으로, 결국에는 후회하는 인생으로 끝을 맺게 되기 때문 입니다. 참 딱하고 안타깝습니다.
자신이 부모나 가족들을 선택한 것 아니요, 자신의 내적 유전적 재능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외모 까지도 자기가 결정한 것 아닙니다. 그를 둘러 싸고 있는 환경과 상황, 그가 속한 나라와 민족은 말할 것도 없고, 그가 처한 시대 까지 이르러 그 자신이 선택하거나 창조한 것은 하나도 없는 데도 불구하고, 자기의 알량한 소견이나, 타락한 이성에 맞추어
자기의 삶을 이리 저리 주장 하려 하는 것은 슬픈 과욕일 뿐입니다. |
|
 |
|
|
최근 보도에 의하면 New York 거주 아시안중 한인의 자살률이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마음이 무겁고 다급한 심정입니다. 살기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을까 싶습니다. 죽을만큼 힘들어도 우리는 우리자신을 마음대로 제재하거나 결정해 버릴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늘 우리와 함께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에게 묻고 의지하십시오. 그분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가 말씀하실수 있도록 그 앞에 계십시오. 그가 친히 정리해 주실겁니다. 이제 우리는 무척 쉽게만 보였던 우리 자신을 re(다시) spect(보다)하여야 할 때 입니다. 결코 함부로 할 수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있느냐 찾으셨던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들을 부르시고 찾고 계십니다. 어디에, 어떻게 쓰시려는지, 무슨 일을 맡기시려는지...우리는 그분의 신비한 계획속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냥 무용지물로 버리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또 내가 설정한 어설픈 기준이나 목표로 하나님의 완전하신 계획을 제한할 수도, 해서도 안됩니다. 그분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부족한 종이 24살 한참 뜨거운 피가 콸콸 온몸을 달릴때, 참으로 이겨내기 힘든 억울한 일을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괴로움으로 핏줄이 터질듯해 하는 아들을 보고 계시던 저의 어머니께서 '얘야,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 그 분께서 너를 다른일에 쓰시려나 보다' 하셨었습니다. 믿음이 아니고는 하실수 없으셨던 말씀이었지요.
그 말씀이 얼마나 강력하였던지 그 후로는 때마다 하나님의 심중을 먼저 살펴 살게 되니 삐걱이던 삶이 수월해지고 넉넉해 지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은 상황을 해석하는 힘입니다.
뿐 아니라 주님께서는 항상 성공해야 한다고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라고 하셨습니다. 반드시 옳아야 한다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나는 길이다' 하셨으니 그 길로 따라 가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말하는 어떤 크고 작은 형태의 여러가지 실패나 성공에는 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멧세지가 있습니다. 성공한 사람에게 주시는 마땅한 멧세지가 있고, 또 실패한 사람에게 주시는 멧세지가 있습니다. 그것을 애써 찾고 따라야 합니다.
'나를 따르라' 는 분명 실패나 성공을 무론하고 누구에게나 주시는 명령입니다. 오직 우리가 마땅히 살아야 할 지고의 길임을 가르쳐 주시는 '명령' 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주님께서 어리석은 부자에 대하여 말씀 하십니다. 그의 관심이 더 많은 재물에만 있던 것을 보시고 어리석다 하셨습니다. 사울과 골리앗은 하나님 없는 거대주의(Gigantism)를 우상으로 받들다가 멸망 하였었지요. 그러나 다윗과 사무엘은 아무리 작은 것 같이 보인다 할지라도 그 속에 하나님 계시면 소중하고 귀중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한낱 양치기 소년에 불과 했던 다윗의 가슴 속에 있던 위대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스라엘을 세웠던 것을 기억합니다.
성경은 어디에서나 우리가 누구인지를 천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르기를 그 이름은 기묘자라(Wonderful) 모사라(Counsellor) 전능하신 하나님이라(The mighty God), 영존하시는 아버지라(The everlasting Father), 평강의 왕(The Prince of Peace) 이라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그 하나님,그 아버지, 왕중의 왕 이신 그 분께 속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분의 뜻이 우리를 통해서 성취된다는 말씀입니다. 이사야에 이르기를 "내 손이 땅의 기초를 정하였고 내 오른손이 하늘에 폈나니 내가 부르면 천지가 일제히 서느니라(사48: 13)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 왕족입니다. 왕족이라는 것 ㅡ 신분에 맞는 품위가 담긴 삶의 태도가 몸에 아주 배어 있어야 합니다. 마치 왕실에 중전이 되면 그에 걸맞는 법도와 품위가 삶에서 늘 풍기어 나와야 그 권위가 서듯 말입니다.
하나님이 크게 보이십니까? 크게 보여야 건강한 상태입니다. 내가, 내 문제가 하나님보다 더 크게 보이면 야단납니다. 위험합니다.
성경에 계시된 말씀을 통해서, 자연을 통해서, 또 기록된 역사를 통해서, 고단한 삶을 통해서 만났던 하나님과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지금 내가 어디쯤에 있는지 점검해 봐야 할 때입니다. 우리의 삶이란 생명의 주인되신 그와 함께 한 역사이어야 합니다. 비록 때로 흔들리고 고단했을지라도 그와 함께 였음에 감격하게 됩니다. 만입으로도 다 감사 못 할 은혜입니다.
이제 2022년! 두 손들고 주님께로 나아옵니다.
'새 술은 새 푸대에!' 깃발과 함께 과연 믿음으로 영육이 다 건강하여 모두 당당한 왕족으로 회복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소원하심이 우리를 통하여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 우리는 왕족입니다!
Happy New Year!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