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광야의 소리 2022-01/02 목차 페이지로 p29-p32  
   

고대 상나라와 한국과의 밀접한 관계 (上)

 
   

(다음 내용은 2014년 출판 『동이 한국사』 의 저자 이기훈 선생의 『잃어버린 한국 역사: 기자조선』이란 강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기자조선(箕子朝鮮)이란 기자(箕子)라는 중국 사람이 다스렸던 고조선(古朝鮮)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알기로는 단군이 고조선을 다스렸는데 왠 중국인이 고조선을 다스렸다 하는 것일까? 최근까지 기자조선의 언급에 많은 사람들이 그것은 중국이 주장하는 것이며 우리가 배울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기자조선은 신라, 고구려, 백제 모두와 연관된 나라이기 때문에 바로 알고 지나가야 한다. 기자조선은 1,122 BC 에서 194 BC까지 927년 동안 이어진 나라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 http://www.cheongjuhan.net/htmls/han04-1-05-8.htm). 성경 역사에 빗대어 보면은 구약의 사무엘 사사/선지자의 시대(솔로몬의 성전 건립 165년 전)에서부터 예수님의 탄생 200년 전까지의 시대이다. 만약 어떤 나라가 한국 역사에서 1,000년 동안 이어졌다면 그것이 가장 중요한 나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역사학계는 기자조선에 대한 역사를 부정해왔었다. 왜 한국과 중국의 주장은 이렇게 다른 것인가?  먼저 기자(箕子)라는 인물에 대해 알아보아야 한다.

 

 

 

 

 

기원전 6세기에 살았던 공자(孔子)는 기자를 은나라 3대 현인 중 한 명 이라고 추켜세웠었다. 그런즉, 공자의 말대로 기자는 은나라 사람이다. 은나라는 하(夏), 은(殷), 주(周) 이렇게 시작하는 중국 최초 왕조 중 하나였으며 1,600 BC 부터 1,046 BC 까지 있었던 나라였다. 은나라는 상(商)나라라고도 한다.  상나라는 중국 두번째 왕졸,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중국의 첫 번째 왕조로 알려져 있다. 고고학에서 하(夏)나라와 연관된 유물이 아직 나오고 있지 않아서 商 까지만 역사적 왕조로 인정받고 있다.

상(商)나라는 주변 국가들과 지속적으로 전쟁을 하며 성장을 하였었다. (파란색은 상나라의 동맹국, 빨간색은 상나라의 적국.) 하(夏)나라를 물리친 商(殷)나라, 그리고 商을 물리친 주(周)나라. 엄(奄) 과 박(亳)은 상나라가 지역별 수도로 세웠던 곳이다.
 

북동지역에 상나라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고죽(孤竹)이란 나라가 있다. 산동반도에는 래이(萊夷)라는 부족이 있다. 6세기 양직공도(梁職貢圖)라는 사신의 그림에는 백제의 사람이 래이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회이(淮夷), 귀방(鬼方)과 견융(犬戎)은 흉노족의 조상들이고 나중에 선비(鮮卑)화 된 사람들이다.

 

 
   

상나라는 중국 역사를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나라이다. 중국을 고대문화를 대표하는 여러가지를 시작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1) 상당히 높은 수준의 청동기 예술품(상감세공(象嵌細工)의 발달)과 전쟁에서 사용되었던 무기들, (2) 계층화된 중앙 정부 시스템, (3) 조개껍데기를 만국통화로 사용, 그리고 대표적으로 제일 큰 공헌은 (4) 한자를 만들어 동아시아 지역에 널리 보급했던 나라이다. 商은 갑자기 나타나 엄청난 문명을 일으킨 미스테리한 나라이기도 하다. (옆사진은 마차에 운전자와 말의 순장(殉葬)). 이런 상나라의 왕 주왕(紂王)의 삼촌(숙부)가 기자였다. 즉 기자는 조카 대신 왕이 될 수 있었던 위치에 있었던 왕족이었다.

 
   

주왕은 그들을 잔인하게 죽였으며 왕에게 충고를 하던 사람 중 하나가 기자였다. 기자는 왕이 자신의 충고를 듣지 않자 결국 머리를 풀어헤치고 미친 사람처럼 신세타령을 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된다그러나, 주왕이 음주와 쾌락에 빠져 국가를 위기에 빠뜨린다. 많은 귀족들이 주왕을 책망하였고. 상나라는 이러한 이유로 내부적으로 약해지고 외부적으로는 서쪽의 주나라에 의해서 상나라는 곧 1,046 BC 에 멸망하게 된다. 주나라는 그 시대에는 이미 없어졌던 고대의 하(夏)나라하고 가까운 지역에 있었던 나라다.

   
   

중국은 스스로를 화하의 후예라고 부르고 있다. 화(華)란 중국 서쪽 화산(華山) 근처에 있던 주나라를, 하(夏)는 상나라에 망한 하나라를 상징하는 글자이다. 중국 서안(西安, 지금은 시안으로 알려져 있고, 고대에는 장안이라 불렸음) 인근에 있는 화산은 주나라 이래로 한나라, 당나라 등 중국 대표 왕조가 도읍한 땅이기 때문에 화하민족의 뿌리(華夏之根)라고 불리고 있다. 현대 중국의 공식 국호인 중화인민공화국에도 화(華)가 있으며, 지금도 한국에서도 중국교민을 화(華)교라고 부르고 있다. 이렇게 민족명이나 국호에 주나라를 상징하는 華가 들어가 있는 것을 보면, 3,000년 전 상나라를 몰아낸 주나라의 영향이 중국인들에게 얼마나 뿌리깊에 남아 있는지 알 수 있다.

   
   

2009년 중국 국무부에서는 《중국역사상식》이라는 공인역사서를 발간했다. 그 역사서엔 서부 산지는 화하(華夏)족 영토, 동부 평원이 동이의 영토로 그려져 있다. 흔히 이 지역을 중국 중원이라고 부른다. 파란색 부위는 동이(東夷)족 수령인 치우의 세력 범위이다. 치우는 하나라 전에 있었던 고대 용산(龍山)문명을 대표하는 동이족 사람들이다. 동이족은 중국의 평지를 대부분 차지하고 있었던 강한 부족이었다. 따라서, 중국에서 화하를 강조하는 것은 모순이다. 화하는 중국 중원의 원래 주인이었던 동이족을 몰아낸 침략자들이기 때문이다. 서쪽 산지에 있었던 주나라는 세력이 약했었다. 상나라가 동쪽의 래이, 회이 등 다른 동이족과 큰 전쟁을 일으키자 이를 틈타 상나라를 점령하게 된다 (circa 1046 BC).

   
   

이 때 상나라를 물리치고 중원을 차지한 주나라 무왕(본명 희발)은 감옥에 있던 기자를 석방한다. 周의 무왕은 평소 기자의 훌륭함을 익히알아 그에게 어떻게 나라를 다스려야 하는지 물었었다. 기자는 새로이 왕이 된 무왕에게 세세하게 통치의 원리를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기자는 상나라 왕족이었으므로 주나라에게 복종하며 살기 어려웠을 것이다. 기자는 주나라의 신하가 되는 것을 거부했을 것이고 그래서 상나라 동북쪽에 있었던 조선으로 망명을 하게된다. (여기서 조선은 고조선(古朝鮮)이며 고조선이란 나라는 역사서에 있는 나라 이름이 아니고 태조 이성계가 1392년 세운 조선과 구분짓기 위해 옛 조선을 古조선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는 周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임명)했다'고 나와 있지만 조선은 당시 주나라가 점령하지 못한 땅이었기 때문에 봉해진 것이 아니라 망명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무왕은 기자를 조선에 봉했으나 (기자를) 신하로 대하지는 않았다." - 《사기》. 당시 상나라는 주나라에게 완전히 망해서 수도가 폐허가 되고 사람들은 대부분 강제로 멀리 이주를 당하게 된다. "성왕(주나라 2대왕)은 은나라의 남은 사람들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주공을 대장으로 동쪽으로 회이 (회화 유역의 동이)를 정벌하고 엄을 멸망시켰다." - 《사기》. 즉 주나라가 상나라 연맹과 적국들을 다 멸망시키고 영토를 차지했다는 말이다. 여기서 주나라가 멸망시킨 뒤 백성들을 이주시켰다는 상나라, 엄, 회의 등은 주나라 주요 민족인 화하족과 다른 동이족 국가들이었다. 그러면 조선으로 이주한 기자는 조선의 어디로 이주했을까? 중국의 주장대로 한반도로 이주했을까?
 
   

당시 상나라는 고조선 서쪽과 경계를 하고 있었다. 당연히 고조선 서쪽 지역으로 이주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현재 고고학에서도 발견되는 것을 보면 상나라가 멸망하던 기원전 11세기 당시 중국 발해만 북부에서 갑자기 상나라 청동기가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기자가 이끌고 온 사람들이 여기로 대거 이주한 증거라 볼 수 있다. 정리하자면 기자는 중국 서쪽의 주나라가 멸망시킨 상나라의 왕족으로서, 주나라를 피해 고조선으로 이주한 사람이다. 기자조선이란, 이렇게 기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는 중국 역사서의 기록에 생긴 나라인 것이다.

그러나, 왜 한국史학자들은 이 기자조선을 부정하는 것일까? 아니, 기자조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기자세력 (상나라의 세력)이 한반도까지 온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기자조선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지도에서 보듯, 상나라 청동기가 아직 한반도까지 이르지 못했었다. 그래서, 한국 학계에서는 한국과 기자조선은 관련이 없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자세력(상나라 유민)들이 이주한 이 지역이 요즈음 한국과 중국에서 조명을 받고 있다. 고고학에서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의하면 바로 이곳이 동아시아의 문명이 시작된 것이라는 것이 정설로 고쳐지고 있어서이다. 중국이 한국의 고대역사를 독점적으로 자신들의 것이라 만들고 세계의 역사학계를 체계적으로 설득시키고 있는 동북공정이 존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중원이 중국문명의 시작지(地)인 줄 알았는데, 오랑캐 땅에서 (만리장성 밖에 있는 동북지역) 중국의 최초의 고대국가형태, 중국 최초의 옥기, 중국 최초의 용 유적 등이 발굴되고 있다.

 
   

화하의 뿌리가 되는 산시성(山西省)도 아니고 화하중류, 또는 중원도 아니고 만리장성 넘어 중국인들이 호, 산융, 동이등의 중국에서는 상스럽게 여겨지는 이름불렸던 오랑캐 사람들이 살던 땅에서 중국 최초의 것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8,000 년 전에 이미 옥기들이 제작되고 있었고 이 옥기들이 일본, 한반도, 중국 남부로 퍼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8,000년전이면 이미 동아시아 문명이 시작되던 시기인데, 가장 앞선 문명이 바로 동북지역이었다는 것이다. 신석기때부터 동아시아를 이미 선두했었던 것을 알 수 가 있다.

그런데 이 지역은 기원전 3세기까지 중국 영토가 아니었다. 기자가 옮겨간 이 지역이 '조선'이라고 하니, 이 땅은 그 전부터 오랫동안 (1,500년?) 중국이 아닌 고조선의 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이 지역은 고조선 뿐 아니라 상나라도 기원한 곳이라고 이미 중국학계에서 인정되고 있다. 상나라가 망하면서 왜 이지역으로 이주한 것일까? 바로 이 곳이 자신들의 기원지이며, 가장 가까운 형제국인 고죽국이라는 나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지역은 동아시아 문명이 시작된 곳이자, 중국 역사서에 기록된 상나라 유민이 이주했다는 '조선'이 있던 지역이었다. 고조선 서쪽지역으로 망명해 온 상나라 사람들이 그냥 고조선 사람들에게  "우리가 살테니 땅 좀 때 주쇼" 했을까?

 
   
당시 이 지역에 있던 고조선의 왕 '단군' 은 기자에게 밀려 도망갔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나온다. "(고조선왕) 단군왕검은 1,500년 간 나라를 다스리다가 주 무왕이 즉위한 해(상나라가 멸망한 1046BC 무렵) 기자를 조선에 봉하자 (수도를) 장당경으로 옮겼다." 《삼국유사》. 단군왕검이란 1,500년 간의 여러 왕들을 하나로 통틀어 표현한 것이며 조선지역에 왕이란 뜻이다. 단군 할아버지를 몰아내고 기자 할아버지가 차지한 고조선의 초기 위치를 중국 역사서에는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1세기 완성된 《한서(지리지)》에서는 "요서 영지(현 중국 천안시)에 고죽성이 있다"라고 나오며 636년 출판된 《수서》에서는 "고죽의 땅은 주나라 시기 기자에게 봉해진 지역이다" 와 "고죽국 옛성은 노룡현 남쪽 12리에 있다" 라고 나온다. 당나라 945년에 쓰여진 《구당서》에서는 "요동의 땅은 주 나라가 기자에게 준 나라이다." 당나라때 요동은 요하 인근을 말한다. 1695년 간행된 《일지록》에서는 "조선성은 영평부(난하 서안 ~ 북경 지역) 경내로, 기자가 봉해진 지역이다" 여기서 조선성은 고조선을 말한다. 즉, 기자를 와으로 한 상나라 유민이 처음 이주한 곳은 한반도가 아니라 현 베이징 동쪽 지역 일대였던 것이다.
 
   

 

이러한 것으로 보아 두 개의 조선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요하 서쪽의 기자가 점령한 조선, 즉 기자조선이 있어고 다른 하나는 같은 지역까지 자리를 잡고 있었고 기자를 피해 요하 동쪽으로 이주한 단군조선이 있었다. 이 두 개의 조선은 서로 다른 나라라고 보는 것이 맞다. 왜냐하면 발굴되는 유물로 볼 때 서로 청동기나 토기그릇, 무덤양식 등이 다르기 때문이다.

고인돌의 분포도를 보면은 기자조선 땅에서는 보통 북방식(탁자형) 고인돌이 없으며, 반면에 동쪽 단군조선(한반도 남쪽 지역까지 포함)에는 북방식 고인돌이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고조선 영역을 추론하게 하는 비파형 동검 분포도를 보면 고인돌의 분포도와 달리 요서와 요동 모두에서 발견되고 있다. 즉, 기자조선 지역 (요하유역)에서 기원전 10세기경 만들어져 점차 동쪽으로 퍼진 것이며 한반도에는 기원전 7세기경에 들어왔다고 한다. (대릉하 유역은 기자조선 북서쪽 옛 고조선의 아사달이란 수도 지역을 가르킨다.)